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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시아의 증언: 믿음에 대한 욕망이거나 불신에 대한 유예」





세기의 금광으로 불렸던 폐광산 살시니유(Salsigne)가 있다. 그 부근에는 여전히 광산 마을 빌라흐도넬(Villardonnel)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으며, 그 주민들이 전하는 말이 있다. 주민들의 말은 과거로부터의 증언이기도 하고, 선대에 의해 현재로 전승되어 온 구술사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현재의 증언에 참여하고, 선대는 과거의 역사에 참여했다. 또, 프랑스 서부,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지역의 어느 버려진 마을 꾸흐버퓌(Courbefy)가 있다. 한국의 사진작가 ‘아해’로 알려진 유모씨가 통째로 사들였다가 그의 사망 이후 지금은 방치된 채로 남아있다고 한다. 마을의 풍경은 매우 아름답지만, 기척 없는 바람이 분다. 마을의 주인은 사라졌고,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에서 몇 겹의 시간을 목도한 것은 오로지 풍경이다. 그리고, 불이 나지 않는다고 믿는 전라북도의 한 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불에 타 죽은 아이의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솟대 당산 앞에서 개를 잡아먹고 검게 타 죽었다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주민들은 구전으로 전승되며 불을 막아준다는 ‘짐대하나씨’를 마을의 상징이자 마스코트로 여긴다.
고영찬 작가는 특정 장소를 탐색하고 그 장소를 중심으로 취재와 조사를 기반으로 한 작업을 하는, 자칭 ‘독학 수사관’이다. 서두에 언급한 이야기들은 고영찬 작가가 발굴해내어 각기 작품으로 승화된 것들로, 버려진 마을 꾸흐버퓌를 소재로 한 <천국의 스파이>(2017), 폐광산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다룬 <태양 없이>(2018), 도난당한 문화재에 얽힌 진실을 탐색하는 <DORORI>(2022)로 제작되었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이 주요한 몇 작품들은, 어떤 사건이나 역사가 존재했던 장소를 현재 시점에서 탐색하며 시작된다. 작가는 구술사 혹은 미시사와 같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기조로 한 작업의 방법론을 구축했다. 이는 작가가 사건과 장소를 조망하는 개인으로서 그것들을 기술(기록)하는 역사가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개개인과 공동체에 형성된 내적 관계 속에서 사실들을 추적하는 과업을 수행할지언정 보다 사적인 터전 안에서 사건과 이야기를 찾아내어 그 실마리를 풀어가기 위한 증언과 증거물을 수집하고 이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기치 못한 이야기 전개와 서사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탐색하기를 즐기는, 다분히 예술가적 태도로 사건과 장소에 접근하는 탐험가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논픽션 위에 성립된 서사가 주관적 해석과 드러나지 않은 사실의 탐색을 거쳐 서사와 이미지 재현을 주도하는 작가의 손에 의해 환상성이 가미됨으로써, 현실 세계의 인과법칙이 뒤섞이고, 예측불허의 스토리 전개나 전통적 리얼리즘의 해체로 이어지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비현실적 서술이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묘사가 독창적으로 발현된, 욕망으로서의 이미지가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가령, <천국의 스파이>에서 사진작가 아해의 흔적을 찾아 꾸흐버퓌에 당도한 작가가 조우한 것은 버려진, 텅 빈, 스산한 풍경이었으며, 이를 목도하였을 때 아해의 서사 대신 풍경의 섬뜩한 아름다움이 작품에 표현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혹은, <태양 없이>에서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갱도 안을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비추었을 때 겨우 시야에 들어온, 핏물이 흐르는 고깃덩어리의 이미지 같은 것이다. 또, <DORORI>에서 사라진 돌오리상이 발견되었다는 장소로부터 사건의 단서를 발견하는 대신 덩그러니 놓여있는 호돌이 석상과 마주하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마치 모든 사건을 목격했을 것 같은 호돌이를 소환하기 위해 주문
1)을 외는, 그 모호한 픽션의 경계와 같은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작업에는 대개 진술의 역설이 숨어 있거나, 혹은 인물의 진술에서 건져내어 작가의 사유를 거치며 파생된 미장센, 정보와 상징을 무디게 만드는 불확실한 이미지들, 빛과 이미지의 고유성에 비롯한 미학적 사념(思念), 이러한 것들이 시퀀스의 주역이 된다. 고영찬 작가가 구술사를 위시한 다큐멘터리에 기반하면서도 거짓 같은 현실, 환상적 서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연유다. 

하나의 사실에는 여러 개의 진실이 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언어화하는 것은 증언이며, 증언은 진실을 주장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증인의 진술이 엇갈리는 것은 다각화된 진실을 낳고, 다각화된 진실이란 복수의 진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 증언을 토대로 구축된 구술사에는 사실보다 ‘진술’이 우선함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고영찬 작가의 작업은 영상 속 실체가 보여주는 현실에의 유사성과 그 실체의 객관성을 평가할 수 없다는 현대 다큐멘터리즘의 불확실성의 원리를 반영한다. 현대 다큐멘터리즘에서의 인터뷰의 철학에 관해 히토 슈타이얼이 기술했듯, ‘목격자 증언, 전문가 인터뷰 또는 참가자 인터뷰는 사실의 재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증인에 대해 불신을 갖는다. 왜냐하면 증인은 진실을 말할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그의 말대로, 증언은 의심스럽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작업의 재료를 다듬어가면서도 동시에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프레임 밖으로 제쳐두고, 오히려 불확실한 이미지와 허구적 상상 같은 것들을 프레임 안에 들여놓는다. 이렇게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며 사건과 장소를 조명하는 작가의 직조된 시선을 따라, 종국에는 그 판단을 유보하는 우리(관객)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진술의 역설이 필연적으로 작동한다면, <DORORI>에서 작가가 스스로의 방법론을 다시 전복한 것은 이에 따른 필연적인 시행착오였다고 볼 수 있다.
 <DORORI>의 중심 소재가 된 ‘짐대하나씨’는 옛 부안읍성의 동문안당산 짐대(솟대)에 올려져 있던 돌오리상3)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국민속백과사전에는 17세기 무렵 이 솟대당산이 세워진 이래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낮에 새끼줄을 꼬아 당산제를 지내며 액운을 막는 의례를 치러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가는 <DORORI>의 제작을 위해 이 민속문화재 짐대하나씨가 마을에서 사라진 뒤 다시 발견되고 반환되는 지난 18년간의 과정을 추적한다. 그런데, 이 추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실들, 짐대하나씨가 ‘사라지고’, ‘전시되고’, ‘발견되어’, ‘반환되었다는’ 그 일련의 사실 속에 부안군청과 문화재청, 세중옛돌박물관, 벅수(장승) 전문가 등 관계자들의 진술이 엇갈린다. ‘사실’은 변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실에 내재한 ‘진실’이 변하였는가?

증언의 과정에는 진술하는 사람에 의해 진실과 담론이 반복해서 더해지고 배제되며, 또한 증식되고 가감되는 과정이 작동한다. 미셸 푸코는 진실의 정치학을 논함에 있어서 이 증언과 진실의 문제를 두고 참과 거짓을 식별하는 기준에 의해 진실을 판별하는 것보다 진실을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 증인은 어떤 식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주체에게 진실의 능력이 있는지 그 여부를 아는 것은, 진실을 정확하게 사유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보다는, 타인들 앞에서 그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이 주체에게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는 주체가 진실과 맺는 윤리적 관계, 즉 진실을 말할 의무, 진실 말하기에 내재하는 윤리적 구조,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할 의무를 부과하는 관계에 관한 문제다. 작가는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들을 수집하면서 진실과 거짓을 유추하는 것보다, 역으로 진술자들을 의심하게 되는 정황
이나 상태를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주체와 진실 사이의 윤리적 관계를 의심하게 되었음을, 종국에는 파레시아4)의 증언을 의심하게 되었음을, <#목격자>이면서 <#전달자>로서 발언의 실천이어야 했을 파레시아가 ‘실체적 진실’을 말하는가를 의심받는 <#배신자>가 되었음을 직감했을 터였다. 그리하여, 작가는 증인, 즉 진술하는 자를 등장인물로 세우는 것이 아닌, 진술의 대상이 된 장소를 탐색하여 그 안에서 증거물들을 탐색하기로 하고, 증인에 대한 의심을 역으로 활용한 영화적 내러티브를 새롭게 구축하여, ‘진실과 담론을 증식하고 배제하는’ 증언들 자체를 다시 ‘목격자로서의 장소'5)로 이끌어 냄으로써 불확실하고, 불분명하고, 감추어진 상황을 연출한다. 이로 인해 작가의 작업 안에서 파레시아는 인물로부터 장소로 탈바꿈했다. <천국의 스파이>에서 역시 파레시아는 인물이 아닌, 장소였지 않은가.

<DORORI>의 일곱 번째 채널 <#배신자>에서 ‘답은 금동대향로에 있다’라는 자막 뒤에 전환된 화면은 실체를 알기 어려운 부연 화상으로부터 곧장 선명한 모습의 금동대향로가 클로즈업된다. 봉황 아래에 5명의 악사와 5개의 봉우리, 기러기로 추정되는 5마리의 새가 있고, 돌오리상의 진실을 의심케 하는 진술을 하는 자가 있다. 7채널을 오가는 서사는 민속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여 미스터리한 실종 사건을 지나, 다시 민속 신앙으로 귀착하는 주술적 회귀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는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을 상정하기에 기인하는, 열린 서사의 시퀀스로 회피를 시도함과 다름없다. 이 7채널의 서사가 보여주는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이미지들은 주술이 아닌 믿음에 대한 욕망이거나 불신에 대한 유예(suspension of disbelief)와 같다. 오히려, 주술은 신앙이 아니라 집단의 영화(榮華)를 위한 최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DORORI>의 서사는 7채널로 분산되어 비선형적 구조를 가지며, 이는 사건의 인과관계나 시간적 순서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고전적인 선형적 서사를 해체한다. 진술의 역설과 목격자로서의 장소라는 고영찬 작가의 접근법은 이렇게 시간성의 해체를 내포한 역설적 내러티브가 성립됨으로써 시퀀스 안에서 자유롭고 유용해진다. 왜냐하면, 작품의 서사가 장면장면(scene)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닌 분절된 쇼트(shot)들의 집합이자 재구성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미 고전적 의미의 서사를 탈피할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고, 쇼트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환상성이 비현실적 서사의 구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담의 비현실적 서사, 픽션과 논픽션의 혼재, 진술의 정치, 목격자로서의 장소 등 다양한 역설들을 품고 있는 고영찬 작가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다큐멘터리적 형식과 태도 위에 서사가 숨긴 욕망의 구조-믿음에 대한 욕망과 그 불신의 유예-를 통찰하고 파레시아의 증언을 은유한다. 



1) 작품에 등장하는 문구 ‘얄리얄리 얄랑셩’은 만화 <달려라 호돌이>(1989, 금성출판사)에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호돌이를 소환할 때 외는 주문이다.
2) 히토 슈타이얼은 『진실의 색: 미술 분야에서의 다큐멘터리즘』(2019, 워크룸프레스)에 수록된「인터뷰의 철학에 대해」에서 오랜시간 만성적 논란을 거쳐 온 다큐멘터리의 불확실성은 다큐멘터리의 표현에 의해 증언이 왜곡되거나 거짓되게 재현될 수 있음을 서술하면서, 증언이란 근본적으로 불투명하고, 주관적으로 착색되고, 이해관계에 좌우되고, 언어의 이미지에 유혹당하고, 자기만 옳다고 믿는 태도에 빠져 있지 않은지 묻는다.
3)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부안 읍내의 지형이 행주형국(行舟形局)이어서 배가 가벼우면 쉽게 전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오리를 올려놓은 짐대를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작가가 현지에서 취재한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돌오리의 꼬리가 부채질을 하기 때문에 마을에 불이 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고 한다. 돌오리상과 불의 관계는 <DORORI> 작품에 일부 반영되었다.
4) ‘솔직히 말하기’(franc parler) 혹은 ‘말의 자유’(liberté de parole)를 지시하는 파레시아는 발언의 내용이나 기술보다는 발언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5)  작가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풍경은 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어나고 있는, 일어날 법한 일들을 가장 가까이서 목도하고 있는 한 명의 목격자와 같습니다. 저는 그곳을 탐사하고, 증인들을 탐문하며 주변화된, 잊혀진,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발굴해 나갑니다.”라고 언급했다. - 고영찬 인터뷰, Corée & Art Online 전, 주 프랑스 한국 문화원, 2020년 외교부 공공외교 역량사업


※본 원고는 팔복예술공장 창작스튜디오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글 임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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