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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밖의 동굴」





‘구프르 마르테르’.
중학생 때 읽었던 소설에 나오는 프랑스의 동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느 한 장면의 묘사가 남긴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주인공은 지하의 감옥에 갇혀있다가 감옥 밖 동굴로 탈출한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더듬고 상처입으며 계속 나아가지만 결국 탈진하여 드러눕고 만다. 그대로 포기하려는 즈음, 문득 등에 닿은 풀잎의 감촉과 뺨에 와닿는 바람을 느낀다. 그는 이미 동굴을 벗어나 지상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믐달이라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을 뿐.


이 소설은 앨프리드 베스터가 1956년에 발표한 <타이거! 타이거!>라는 작품이며 뒤마의 걸작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SF로 재해석한 피카레스크 모험담으로서 SF문학사에서는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위에서 언급한 곳은 프랑스 남부, 스페인과의 접경지역에 실존하는 ‘Gouffre Martel’ 동굴이다. 발음을 우리말로 쓰면 ‘구프르 마르텔’이 맞겠지만 중학생 때 읽은 판본은 일본어 중역판이었는지 ‘마르테르’라고 표기했었다.

성인이 되어 동굴 탐사를 다니게 되었지만 사실 구프르 마르테르를 읽은 기억과는 별 상관이 없다. 역시 중학생 때 읽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본 외계 얼음동굴 상상화가 더 직접적인 동인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둘 다 중학생 때 처음 접한 것이다. 아마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읽었던 두 책에서 동굴의 심상이 중첩되어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동굴 탐사를 왜 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주탐사를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그 대안으로’라고 답을 하곤 한다. 동굴 깊숙이 들어가 앉아서 가만히 있으면 이곳이 지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단지 익숙한 중력밖에 없다. 나머지 차이들은 우주복으로 다 가려질 것이다.
 

기실 우주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동굴이다. 우주는 어둡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주는 암흑의 공간이다. 나는 그 어둠이 두렵기보다는 어쩐지 안온하게 다가온다. 어둠은 흔히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고 대개는 ‘어둠의 세력’ 같은 식으로 부정적인 느낌의 표현과 붙는다. 보이지 않기에 불안할 것이다. 뭐가 있는지 알 수 없기에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주의 어둠은 원초적인 가능성의 총집합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나올 수 있는 거대한 자궁이다. 인간이 막막한 암흑 속 우주에서 한 줌도 안되는 태양의 빛에만 모든 것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물론 이해하지만 그걸 맹목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어둠과 친해지고 어둠 속에서 평안과 지혜를 구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일 수 있다.

<타이거! 타이거!>에는 흥미로운 설정이 하나 나온다. 어느 순간 인간의 감각이 뒤죽박죽이 되어 외부 자극과 뇌의 해석이 일치하지 않는다. 소리는 빛으로 보이고 빛은 맛으로 느껴지는 식이다. 인간은 외부 환경을 인식할 때 90%는 시각 정보에 의존한다고 하는데, 동굴 안에 들어가면 시각적 자극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리에 민감해지게 된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그 소리가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만약에 동굴에서 아주 오래 머문다면 나에게도 감각 혼란이 일어날까? 적응 기간을 거치면 세상과 우주를 인식하는 새로운 감각의 지평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타이거! 타이거!>의 주인공은 동굴 밖으로 나왔으면서도 시각 자극이 전무한 탓에 여전히 동굴 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를 깨운 것은 시각이 아닌 촉각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너무나 명징한 진리이다. 외부 세계의 90%는 눈으로 알 수 있지만 그것으로 퍼즐이 완벽히 맞춰지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는 감각들, 그게 뒷받침되어야만 비로소 주관적 인지가 완성된다. 물론 해석은 또 다른의 차원의 얘기지만.

이 모든 레토릭들을 접어두고, 나는 그저 이 말을 남기고 싶다. 동굴 깊숙이 자꾸자꾸 계속 들어가서 조그만 구멍 하나를 빠져나가면(여기까지는 실제로 동굴 탐사하면서 이따금 경험하는 일이다) 어느 순간 막막하게 펼쳐진 암흑이 온화하게 맞아주는, 그런 거대한 우주와 마주하는 꿈을 꾸고 싶다. 등에 닿은 대지를 의식하면서 동시에 우주의 바람을 느끼고 싶다.


※본 에세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역예술도약지원사업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글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ㅣ동굴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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